2021년 4월 3일 토요일

외래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상황 1

1. 외래 시간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약 환자가 너무 많아요.

한 줄 답변: 예습, 복습을 하고 일찍 시작하세요.


우리나라 외래에서 한 환자의 진료에 주어진 시간은 2-3분입니다. 3분에 한 명 예약이 되었더라도 환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 의무기록 여는 시간, 처방하고 설명하고 기록하는 시간을 빼면 문진이나 결과 확인, 상황 판단 및 치료계획 수립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2분 정도입니다. 아무리 짧아도 환자 한 명당 10분은 있어야 minimal한 정상 진료 흉내라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합니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수 밖에 없다지만 우리는 떠날 곳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의료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나라에서 의사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오전에 50명 정도 진료하면서 외래 시간을 지연시키지 않는 저의 비법을 공개합니다.

1) 외래 전날 사전 결과 확인 및 의무 기록. 외래 전날 오후 혹은 저녁에 다음 날 오실 환자의 의무기록을 미리 정리합니다. 일부 PA 간호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내시경 사진과 CT 사진을 가져다 붙이고, 치료 계획을 고민하여 설명할 문구를 미리 써 두는 일은 전적으로 저의 몫입니다. 보통 1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무척 힘들지만 환자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기분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2) 퇴원 환자 외래 의무기록 사전 작성. 퇴원 환자가 몇 주 후 외래를 찾아오면 입원 기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공의가 작성한 퇴원요약을 결재할 때 미리 외래 방문시 보기 쉽도록 의무기록을 작성해 둡니다.

3) 다른 과 의뢰가 필요한 환자는 전날 담당 간호사에게 연락하여 미리 외래를 잡아둡니다. 환자에게 연락이 가게 되는데, 환자들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구나' 등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상황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외래에 오십니다. 훨씬 소통이 쉽습니다. 시간도 절약됩니다.

4) 설명 자료를 미리 만들어 둡니다. 저는 15년 전부터 외래설명자료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 대한 모듈화된 진료가 가능합니다. 내용을 의무기록으로 옮겨두면 소통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설명서, 팜플렛 등을 준비하는 것도 좋습니다.

5) 외래를 약속시간 15분 전에 시작합시다. 환자는 다른 환자로 인하여 자신의 외래진료가 조금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그러나 의사가 진료를 늦게 시작하여 자신의 외래진료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화를 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일찍 시작합시다. 습관적으로 외래를 늦게 시작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6) 외래에서 판단이 어려운 환자에 대하여 오래 고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확한 판단이 어렵습니다. 일단 기본 검사를 하시고 다음 주에 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좀 더 고민해보고 다음에 잘 설명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외래가 끝난 후 찬찬히 고민하면 됩니다. 책도 찾아보고, 문헌 검색도 하고, 동료 및 선후배와 상의하여 답을 찾으면 됩니다. 그게 환자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7) 설명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환자에게는 "다른 환자를 먼저 진료하고 맨 마지막에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해 보십시오. 한두시간 기다리시는 분 많습니다. 대신 맨 마지막에 충분히, 정말 충분히 상담하고 설명해주셔야 합니다.

8) 실행가능한 스케쥴로 예약을 잡아야 합니다. 평균적으로 외래가 4시간 걸리면, 4시간에 분산하여 예약을 잡아야 합니다. 뻔히 4시간 걸릴 줄 알면서 3시간 스케쥴로 예약을 잡으면 뒤쪽으로 갈수록 환자가 밀립니다.

* 참고: EndoTODAY 이준행 진료비법


 2. 환자/보호자가 진료 내용을 녹음하는데요.

한 줄 답변: 녹음은 적법한 일입니다.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적응하는 수밖에...


참 어려운 이슈입니다.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가 진료실에서 의사와의 대화내용을 녹음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이런 일까지 있었습니다. ESD를 위하여 입원한 환자(70대 여성)에게 궁금증이 없는지 물었더니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외래에서 설명한 내용을 녹음하여 듣고 또 들었기 때문에 궁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저는 녹음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와 같은 환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방법도 없습니다. 녹음이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면 충분합니다. 의사 얼굴에 들이댈 필요도 없습니다. 녹음 버튼을 누른 후 스마트폰을 호주머니에 넣어도 녹음이 잘 됩니다. 삼성, LG, 애플 스마트폰 모두 녹음기능이 놀랍습니다. 너~~~무 잘 만들었습니다.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환자가 대화 내용을 녹음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진료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병원 감염 예방의 기본 원칙인 universal precaution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늘 조심해야 합니다. 늘 바른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환자들은 스스로 잘 치료받기 위하여 녹음하는 것입니다. 무슨 흠을 잡으려는 경우는 드물 것 같습니다. 선의의 녹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더라도 뭔가 문제가 꼬이면 녹음된 내용으로 트집잡을 일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의료가 점점 건조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CCTV를 의식해가며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선생님이나, 그런 선생님에 의지해야 하는 아이들이나, 녹음을 의식하며 진료해야 하는 의사나, 그런 의사에게 진료받아야 하는 환자나 모두 피해자입니다. 불쌍한 노릇입니다. '불신의 비용'치고는 너무 가혹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법적 측면은 이렇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녹음 자체가 위법은 아닙니다. 의사에게 동의를 구한 후 녹음하는 것뿐만 아니라, 몰래 녹음하는 것도 위법은 아닙니다. 심지어 증거능력도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눈 당사자 모두가 대화내용에 대하여 일정부분 지분이 있다고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의사는 원하지 않는데 환자나 보호자가 녹음을 원하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진료에 방해될 수 있으니 녹음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도가 최선일 것 같습니다.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요청해 보는 것이지요. 과거 제 경험으로는 정중히 부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꼭 녹음을 해야겠다고 우기는 환자나 보호자는 없었습니다. 혹시 있더라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요청해 보는 수밖에...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녹음을 자제해 주십시요. 마이크 앞에서는 연예인들조차도 부자연스럽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평범한 의사인 저는 마이크가 무섭습니다. 마이크 앞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도무지 정확히 판단하고 있는지 자신감도 사라집니다. 너무 떨려서 말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진심입니다. 그걸 어떻하겠습니까? 저는 의사입니다. 연예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녹음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환자분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환자분을 위하여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부탁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꼭 녹음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시면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저는 대부분의 환자를 표준 module을 이용하여 진료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소개드린 외래설명자료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대형병원에서 좁은 영역의 진료만 담당하고 있기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저는 절름발이 의사입니다. 위암과 위식도역류질환에만 집중하는 이상한 의사입니다. 변비 환자가 오면 벌써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당뇨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기위암 내시경치료에 집중하는 ultra-selective specialist의 삶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참고 사는 것이지요. 큰 의료 시스템의 한 부속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Ultra, super, selective, specialist라는 부속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 저는 저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엄청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specialist로서 뻔한 환자만 진료하고 있는 제게는 녹음이 큰 이슈는 아닙니다. 환자나 보호자나 제 3자가 녹음을 원하면 말리지 않고 있습니다.

요약합니다.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적응하는 수밖에... 모든 환자가 녹음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늘 조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 참고: EndoTODAY 진료 내용을 녹음하는 분들에 대하여


 3. 환자가 의무기록 변경을 요구하는데요.

한 줄 답변: 의무 기록은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추가할 뿐입니다. 과거의 기록은 모두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환자에게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의무기록 자체가 공문서입니다. 한번 기록한 내용은 영원히 남습니다. 없애면 안되는 일입니다. 오타 등을 고치더라도 다 기록을 남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종이 문서의 경우 틀린 곳을 두 줄로 긋고 새로운 내용을 쓴 후 고친 시간과 고친 사람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남깁니다. 전자차트의 경우 두 줄을 그을 수 없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을 그대로 두고 하단에 '위 내용 중 어떠어떠한 부분은 오류인데 이러이러한 이유로 언제 누가 어떻게 고친다'고 덧붙이는 방법을 쓰시기 바랍니다."

2015년 4월 22일 저녁 개업의 선생님들을 모신 (저의 마지막) 제약회사 주관 심포지엄에서 아래와 같은 답변을 받았습니다. "몇 개월 전 외래기록의 '과거력: 3년 전 내시경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있다고 들음' 부분을 지워달라고 요청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답변해야 좋을까요?"

이런 경우는 대부분 암보험이나 실손보험 등 사적 건강보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보험 계약자의 고지의무에 대한 것이지요. 몇가지 조건 혹은 fact를 생각해봅니다.

1. 과거 의무기록 내용은 환자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2. 의사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환자가 이야기하지도 않은 것을 남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3. 과거 의무기록은 지울 수 없습니다. 변경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4. 의사는 경찰이 아닙니다. 환자 말씀의 진실성을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5. 만약 수정을 하더라도 환자 말씀에 근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조건을 고려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의무기록에 추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과거의 기록은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지우지 말고.

"3년 전 내시경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있었다는 XXXX년 X월 X일 의무기록은 환자의 현재 기억과 다르다고 함. 환자 말씀에 의거하여 3년 전 내시경 소견을 변경함. 3년 전 외부 내시경: 정상"

환자를 위한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의무기록을 수정하면 곤란합니다. 한번 쓴 의무기록은 절대로 없앨 수 없습니다. 절대로 없애면 안 됩니다. 환자에게 좋지 않은 결말이 벌어집니다. 돈을 받았다가 토해내야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저렴하고 질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 됩니다. 환자가 별도로 계약한 사적 보험을 위하여 의무기록을 위조하면 안됩니다. 과거 의무기록을 없애는 것은 의무기록 위조에 해당합니다. 환자를 위한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불법행위를 저지를 수 없습니다.

단순해집시다. 원칙은 지킨다. 예외는 없다. 끝.


 4. 진단서에 진단일을 써 달라고 하는데요.

한 줄 답변: 진단일은 비워 두십시오. 진단일에 대한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단일을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진단"이라는 개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단일'의 개념을 질병통계를 내기 위하여 행정적으로 사용한 적은 있습니다. '몇 년도에 위암 환자 몇 명' 정도의 통계를 얻기 위한 대강의 자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적 계약 영역인 (암) 보험금 급여여부 판정을 위한 '진단일'의 의미를 국가나 공적인 기관에서 정한 적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내용을 듣거나 배운 적은 없습니다.

내시경으로 발견한 암을 생각해봅시다. 내시경 검사로 암을 의심한 날, 내시경 조직검사를 판독한 날, 내시경 조직검사 결과지가 의료진에게 전달된 날, 의료진이 파악한 내용을 환자에게 통보한 날 등 여러 날짜가 다 암 진단과 관련된 날입니다. 내시경에서 암 의심으로 의사가 결과지에 '위암'이라고 썼는데 조직검사에서 암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합시다. 내시경 조직검사 재검을 통하여 위암으로 뒤늦게 확인되었다면 위암을 처음 진단한 날은 언제일까요? 여러 병원을 옮기면서 어렵게 진단한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사실 의사는 '진단일'이 언제인가 따지기보다는 환자의 현 상태가 어떠한지, 어떤 치료가 최선인지, 더 좋은 결과를 위하여 혹시 빠진 것은 없는지 등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의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급한가의 문제입니다. 의료진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환자와 상의합니다. 내 환자가 암보험으로 얼마나 큰 돈을 받을 수 있는가는 질병자체의 치료보다는 부수적인 문제입니다. 의사들이 정확히 알 수도 없습니다.

진단서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입증가능한 내용을 요약한 공문서입니다. 의사가 쓰고 싶은 바대로 혹은 희망하는 바대로 쓸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불명확하거나 너무 복잡한 내용은 '의무기록복사'로 대신하는 것이 정확성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2016년 __월 __일 대장내시경에서 ______에 ___ cm 대장용종이 발견되어 포셉으로 조직검사를 하였고 이로서 용종이 제거되었음. 최종 조직검사는 선종으로 나왔음.


이런 기록을 본 적도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진단서를 받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수 밖에 없습니다.

* 참고: 'MALT 림프종 의심'으로 의뢰되어 병리슬라이드 재판독 후 MALT 림프종으로 진단된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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